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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바르티매오라는 눈이 먼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오늘 마르코 복음에서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특징적인 모습은 “스승님!”이라는 칭호에서 잘 나타납니다. 루카나 마태오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보기는 하지만 거기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오직 마르코 복음에서만 예수님을 “스승님!”, 즉 “라뿌니!”라고 부르는데 이는 요한복음에서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부르는 방식과 같습니다.
바르티매오가 나자렛 사람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여기게 된 것은 배움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런 믿음에 이르게 하는 배움을 우리는 ‘기도’라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떠한 기도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만드는지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바로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여기며 배우려 하는 자세입니다.
기도는 무엇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자신의 ‘생각’과의 싸움입니다. 생각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고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하와는 뱀과 대화하면서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잊었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세속-육신-마귀의 욕구가 증가함으로써 결국엔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만듭니다. 생각을 결코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에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숲에서 다람쥐가 야생 비둘기에게 말했습니다. “눈송이 하나의 무게가 얼마인지 알아?” 야생 비둘기가 말했습니다. “무게가 거의 없어.” 다람쥐가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 해 주지. 내가 전나무 둥치 바로 옆 가지에앉아 있었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 많이 오는 것도 아니고, 심한 눈보라도 아니었어. 전혀 격렬하지도 않고 마치 꿈속처럼 내렸어.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앉은 가지 위에 내려 앉는 눈송이들의 숫자를 세었어. 정확하게 3,741,952개였어. 네 말대로라면 무게가 거의 없는 그다음 번째 눈송이가 내려앉는 순간 나뭇가지가 부러졌어. 그 순간 나는 재빠르게 다른 가지로 뛸 수 있었지. 만약 내가 하나의 숫자에 집중하여 정신 차리고 있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던 거야.” |
기도는 이와 같습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면 그 생각이 아무리 가벼운 생각이라도 결국엔 나를 죄로 떨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을 보고 있다면 괜찮습니다. 다람쥐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생각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숫자’에 집중한 것입니다.
수많은 명상의 전문가들조차 명상은 기도를 끊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라이프 코치이며 영적 카운슬러인 크리스틴 해슬러는 처음 명상 수련할 때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해도 생각을 중지시킬 수 없어서 계속 나 자신을 ‘형편없는 수행자’라고 비난했다.”
언플러그 명상 설립자 수지 얄로프 슈와르츠는 말합니다.
“명상하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고, 지루해서 견딜 수 없었다. 시간 낭비라는 생각만 들었다.”
독자적인 요가법을 창시한 브렛 라킨도 고백합니다.
“종아리와 발이 가장 고통스러웠으며, 등은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그런 와중에도 잠에 곯아떨어졌다.”
[참조: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더숲]
이 명상의 대가들이 힘겨워했던 내용이 바로 우리가 기도할 때 느끼는 어려움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은 생각만 없애려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우리 속의 원숭이들을 보고 있으면서 원숭이 생각을 안 하려 노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게 잘 될까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냥 생각을 멈추려 한다는 것은 “절대 생각하지마. 특별히 원숭이 생각은 하면 안 돼!”라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만히 있는데 “코끼리 생각하지마!”라고 하면 머리에 코끼리가 떠오릅니다. 이렇듯 생각은 멈추려 한다고 멈춰지는 게 아닙니다. 그 멈추려는 생각이 더 나고 그 멈추려는 주제가 더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각할 수 있는 가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와가 뱀과의 대화를 멈추려 했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등 뒤에 하느님을 바라보았다면 자동적으로 자아와의 대화는 끊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생각을 멈추려 하지 말고 하느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바라봐야 할까요? 바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냥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스승님!’으로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스승에게는 무언가 배웁니다.
우리가 교실에서 무언가 배우기 위해 선생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창문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할 때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왜 오늘 바르티매오나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라뿌니!”라고 했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분심을 끊는 일은 그저 내 앞에 예수님께서 스승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 그분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는 노력으로 좌우됩니다. 물론 자아와의 대화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 쉽게 그분에게 집중하고 배움을 얻게 되지는 않습니다.
기도의 어려움 때문에 금방 짜증이 나는 사람은, 망고 씨를 땅에 묻어놓고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는 데도 왜 망고나무가 생기지 않고 망고 열매가 맺히지 않느냐고 짜증 내는 원숭이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랜 노력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잘 안 되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고 조금씩 성경 말씀을 통해 그분이 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할 때 분심을 없애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그리스도를 내 앞에 모시되 그분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바라보고 듣고 배우는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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